우리 곁의 소월 시를 찾아서(2)- 금정산, 금곡동
국제소월협회, 20230325 토요일
구자룡 관장(부천문학도서관장,서지학자)의 이전조사에 따르면, 부산시 금정구 장전동 ‘시밭골 사람들’이라는 곳에 ‘엄마야 누나야’ 시비(詩碑)가 있어야했다. 그래서 금정산 입구의 법성사를 집결장소로 정한건데, ‘시밭골’도 ‘엄마야 누나야’도 그 근처에선 찾을 수 없었다. 회원분들과 같이 자동차로 이동하여 근처의 광명사에 주차하고 작은 계곡을 지나 삼밭골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서울 가서 김서방’찾기 식이었다.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그런거 본적 없다는 대답뿐이다. 의논 끝에 금정산 반대쪽의 화명 금곡 쪽으로이동 하기로 했다. 택시와 우리 차에 나눠타고, 숲향 가득한 금정산을 넘어 산성마을을 지나, 낙동강 쪽으로 이동하였다.
화명 낙동가 가의 금곡 벽산 한솔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아파트 단지 내에 박목월, 이해인, 노천명 등의 시가 적힌 작은 시비가 꽤나 여럿 있었다. 우리가 찾는 소월 시비는 한솔아파트 후문쪽의 상가 앞에, 그러니까 103동 옆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그리고 ‘눈 오는 저녁’ 두 편의 소월시 앞에서 우리는 낮게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고, 상가 부동산 가게의 어느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소월시비 찾기 탐사 활동에 참가하러 오신 국제소월협회 회원님들을 위해 점심 식사는 손길모 회원께서 한턱 내셨다. 차로 7~8분 이동하여 범서미라클 빌딩 11층의 이름난 숯불갈비집에서 화기(火氣) 넘치는 시간을 화기(和氣)롭게 가졌는데, 둘둘말려 나와서 주먹덩이로 잘려진 갈비와 냉면, 그리고 하양 고깔콘에 얹힌 하얀 아이스크림이 맛있었다. 식사 후에는 그냥 그 자리에서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동요인가, 사회시(애국시)인가’라는 주제로 미니 강의가 있었다.








시에 대한 평가나 평론은 그 시를 대하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1922년 1월에 <개벽>지에 처음 이 시가 발표된 그 시대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의 그 악랄한 토지조사 사업이 끝나 우리 농민들이 땅을 잃고 만주로 어디로 유랑하던 시대였다는 것, 1922년 9월22일부터 10일동안 <동아일보>에 황해도 나무리벌에서 쫒겨난 농민들이 만주의 봉천을 유랑한다는 르포 기사가 실렸다는 것, ‘엄마야 누나야’는 1924년 11월24일 <동아일보>에 실린 소월 시인의 다른 시 ‘나무리벌 노래’라든가, ‘옷과 밥과 자유’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등 다른 시와 같이 읽고 같이 새겨야 시가 쓰여진 그 시대적 배경과 시의 의미가 온전히 살아난다는 그런 이야기를 회원분들과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엄마야 누나야’를 최초로 작곡한 안성현 작곡가 이야기, 왜 이 분의 ‘엄마야 누나야’가 군부독재 시절에 전 국민 금지곡이 되었는지, 안성현 작곡가의 또 다른 멋진 곡인 ‘부용산’에는 어떤 사연이 얽혀있는지 그런 이야기도 잠시 나누었다.
다른 분들은 오후 3시에 다른 행사가 있다고하여 그쪽으로 이동하고, 몇 사람은 다시 북구 금곡동의 주공아파트로 차를 돌려 되돌아갔다. 그러나 주공 아파트 단지가 워낙 넓고 커서 어디에 소월시비가 있는지 찾기가 어려웠다. 인터넷을 다시 뒤지고, 3단지와 4단지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보고, 지나가는 경비 아저씨와 무슨 공공기관 사무실에 들어가 물어도 보면서, 4단지 앞쪽에 무슨 시비가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정보가 맞았다. ‘엄마야 누나야’ 시비는 4단지 402동 앞의 작은 어린이 공원시설 화장실 쪽에 있었다. ‘무지개 6 어린이 공원’이라고 되어있다. 시비는 다른 곳에 비해 크고 웅장하였으나, 아무도 관리를 안하는지 시커멓게 방치되어 있었다. 물질적으로만 번듯하고 겉으로 삐까번쩍하다고 문명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정신적인 소홀함과 별로 문화적이지 않은 여러 행위들이 말끔히 뿌리뽑혀 나갈 때, 우리의 삶도 좀더 내면적으로 풍성해지지 않을까, 사막같은 이 현실이 조금이라도 개선되어 마음 바닥이 푸르게 푸르게 다시 차오르지 않을까, 이틀간의 야외 탐사를 마무리하며 잠시 생각해본다.



